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군 6진 (문단 편집) === [[후삼국시대]]~[[고려]] === [[926년]] [[발해]]의 멸망 후 [[함경북도]], [[평안북도]] 전 지역, 그 외 [[함경남도]], [[평안남도]] 일부 지역이 한국계 국가의 지배 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. [[삼국사기]] [[신라]]본기의 886년([[헌강왕]]조) 기사에 따르면 신라와 발해 사이에 [[보로국]](寶露國)과 [[흑수국]](黑水國)이란 나라가 있고 이들이 신라와 외교를 시도한다. 이런 기록으로 보아 함경도 지역은 기록이 부족해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을 뿐, 이미 발해 멸망 수십 년 전부터 신라의 [[후삼국시대]]마냥 사실상 발해 중앙정부의 제어를 벗어나 있던 것으로 보인다.[* 이미 발해 멸망 이전부터 여진의 남하가 확인되었다.] 이후 고려 대에 수복하는 [[평안남도]], [[평안북도]](서북면)와 [[함경남도]](동북면)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[[조선]]이 건국될 때까지 특정 국가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[[야인]]들의 영토가 된다. 물론 발해 멸망 이후 [[거란족]]이 세운 [[요나라]]와 [[여진족]]의 [[금나라]], [[몽골]]의 [[원나라]] 및 [[한족]]이 세운 [[명나라]]까지도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 및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지배력이 미비하여 제대로 된 관리가 없는 토착 주민들만 사는 지역이었으나, 여말선초 시기의 북방 경략 이후 조선으로의 동화 정책이 빠르게 이루어짐에 따라 비로소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. 고려 [[태조(고려)|태조 왕건]]은 [[발해]]가 멸망하자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진정책(北進政策)을 추진, 서경(西京, 지금의 [[평양시|평양]])을 비롯한 [[평안남도]] 일부 지역을 수복했다. 이후 [[성종(고려)|고려 성종]] 13년(994년)에는 [[청천강]](淸川江) 이북의 [[여진족]]을 토벌하고 [[강동6주]](江東六州)를 설치함으로써 마침내 한반도 국가의 서북 경계 끝이 [[압록강]]에 이르게 되었다. 그러나 고려 예종 시기(1108년) [[윤관]]의 고려군이 [[천리장성]]을 넘어 [[함경북도]] 지역에 [[동북 9성]]을 [[고려의 여진 정벌|개척해보려 시도했지만]] [[여진족]]의 반발로 1년만에 반환해야 했고, 이후 260여 년 간 고려의 영토는 천리장성 이남으로 완전히 확정된다. 그러다 고려 말기 [[공민왕]] 시기에 이르러 [[평안북도]] 일부 지역(북한이 변경한 행정지역이 아니라 조선~대한민국기준)을 회복하는데, 공민왕 10년(1361년) [[압록강]] 하류 지역인 [[창성군|창성]](昌城)·[[벽동군|벽동]](碧潼)·[[강계군|강계]](江界)에 진출하여 강계만호부(江界萬戶府)를 두었다. 또한 원 간섭기 시절 [[몽골]]에게 빼앗긴 [[함경남도]] 지역을 되찾는 데에도 성공했다. 원래 화주(和州, 지금의 함경남도 [[영흥군]]) 이북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(流移民)과 여진인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는데, [[대몽항쟁]] 시기인 [[1258년]](고종 45년)에 이 지역의 용진현(龍津縣) 사람 [[조휘]](趙暉)와 정주 사람 [[탁청]](卓靑)이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항복했다. 이후 몽고는 여기에 [[쌍성총관부]](雙城摠管府)를 세우고 조휘를 총관(摠管), 탁청을 천호(千戶)로 삼았고, 조휘와 탁청의 일족들이 총관과 천호를 세습하면서 이 지역을 다스렸다. 공민왕 5년([[1356년]])에 대대적인 반원운동(反元運動)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철령(鐵嶺)[* [[함경남도]] [[안변군]]과 [[강원도]] [[회양군]] 사이에서 양도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고개.]을 넘어 이 지역을 공격했고, 당시 총관이었던 조소생의 숙부인 [[조돈]](趙暾)과 해당 지역의 토착 천호였던 [[태조(조선)|이성계]]의 아버지 [[이자춘]]이 고려군에 내응하면서 100여 년 간 잃어버렸던 [[함경남도]]를 되찾게 되었다.[* 다만 이후 [[명나라]]가 중국 땅을 멋대로 빼앗았다며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면서 [[위화도 회군|한바탕 난리]]가 나게 된다.] 이후 [[홍건적]]이 서북 지역을 침입해와 [[평안도]]가 뚫려 [[개경]]이 함락되었고 공민왕이 복주(福州, 지금의 [[경상북도]] [[안동시]])으로 파천했지만 [[정세운]](鄭世雲), [[안우]](安祐), [[최영]](崔瑩), [[태조(조선)|이성계]] 등의 명장들의 활약으로 회복했고, [[원나라]] 장수 [[나하추]](納哈出)가 수만 군사를 이끌고 동북면 쌍성(永興, 영흥)에 쳐들어오지만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[[함흥시|함흥]] 평야의 대회전(大會戰)을 벌인 끝에 참패하고 달아났다. 이로서 해당 지역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. 이후 [[함경남도]] 일부 지역도 회복되는데 당시 고려 변방의 방위를 맡고 있던 [[태조(조선)|이성계]](李成桂)가 여진족·달달(達達)[* 타타르의 음차 표기로 북원 잔당들을 가리킨다.]·요심(遼瀋)[* 요양 및 심양의 준말로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일대를 가리킨다.] 등과 인접한 요해지로써 자주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는 아오(我吾)·읍초(邑草)·갑주(甲州)·해양(海陽) 등 변경에 대한 방위 대책을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, 고려 마지막 왕인 [[공양왕]] 3년(1391년)에 이성계에 의해 [[갑산군]] 지역이 회복되어 갑주만호부(甲州萬戶府)를 설치했다. 하지만 여전히 [[함경북도]], [[함경남도]], [[평안북도]] 북부 지역 대부분은 500년 가까이 야인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, 고려를 이은 조선은 다시 고토 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